필리핀에서 그분과 함께

‘만일 예수회에 입회하지 않았더라면 절대 해볼 수 없는, 아니 해보겠다는 꿈조차 꾸지 못할 일들을 나는 예수회에서 경험하고 있다.’ 아마 대부분의 예수회 연학수사들이 이 말에 동의할거라 생각합니다. 이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원기와 수련기를 거쳐 철학기를 보내고 있는 지금 이 시점에서도 이러한 생각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지난 여름, 저는 한 달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필리핀에 다녀왔습니다. 예수회 수사들은 보통 첫 서원 후 철학을 공부하는 1년 차 방학에 필리핀으로 체험(Exposure)을 다녀오는데, 저 또한 연학수사로서 첫 번째 방학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필리핀 체험의 주된 목적은 영어연수이지만, 프로그램은 이 밖에도 다양한 국적을 지닌 예수회원들과의 교류나 빈민지역인 나보타스(Navotas) 내 가정에서의 홈스테이 등 다양한 체험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체험 중에 하느님께로부터 덤으로 받은 몇 가지 선물에 관해 나누고자 합니다.

사실 필리핀으로 떠나기 전에 저의 내적인 상태는 그다지 밝지 못했습니다. 오랜만에 다시 시작한 공부, 그것도 난해한 철학 공부가 가져다 준 어려움은 저를 어두운 터널로 깊숙이 밀어 넣었고, 그 터널은 마치 끝이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첫 학기를 겨우 마치긴 했으나 앞으로 계속해야 하는 학업에 대한 걱정은 여전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런 마음 상태로 필리핀을 간다는 것이 솔직히 내키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현지에 적응할 틈도 없이 입국한 다음 날 곧장 나보타스에 가야 하는 일정, 무엇보다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타국에 체류하는 일이 난생 처음이라는 사실이 저의 발걸음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저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겨우 이끌고 필리핀 땅을 밟았습니다.

숙소에 도착해서 짐도 제대로 풀지 못한 다음날 아침, 예정대로 나보타스로 떠날 준비를 했습니다. 그런데 나보타스행 차량에 탑승하기 직전, 문득 두려움이 크게 밀려왔습니다. 언어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 상태에서 서로 다른 나라에서 온 여섯 명의 수사들과 함께 출발하는 것이 부담스러웠고, 말로만 듣던 현지의 열악한 상황을 실제로 마주할 자신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현실로 다가오자 공포가 엄습함을 느꼈습니다. 그런 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한국관구 소속의 한 수사님께서는 일단 하루 이틀 경험해본 후 도저히 생활하기 어렵겠다 판단이 서면 언제든 돌아와도 좋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저는 복잡한 심경을 안고 나보타스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한 나보타스에서의 생활은 괜찮았습니다. 물론 낯선 환경이 주는 긴장감은 있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괜찮은 형편의 가정에서 따뜻한 환대를 받으며 머무를 수 있었습니다. 두려움이란 본래 어떠한 상황을 마주하기 전이 더욱 크며, 이를 맞닥뜨리게 되면 오히려 그 크기가 줄어든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큰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이는 스스로에 대한 과신이 아니라,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용기와 더불어 하느님께서 언제나 제 곁에 현존하신다는 확신에서 오는 자신감이었습니다.

인상적이었던 나보타스에서의 체험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예수회 공동체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모인 예수회 연학수사들이 공부하는 아루페 국제 공동체(Arrupe International Residence)에서 머물렀는데 이곳에서의 생활은 무척이나 즐거웠습니다. 제가 영어를 그리 잘하지 못하기에 원활한 소통에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마저도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나아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는 단시간에 저의 영어 실력이 늘었다기보다도 많은 수사님들이 저를 배려해주고 관심을 가져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 생각합니다.

머무는 동안 하느님께서 저에게 주신 선물들에 대해 새삼 감사함을 느끼게 되는 계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축구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었습니다. 아루페 공동체 수사들은 일주일에 풋살을 세 차례 그리고 필드 축구를 한 차례 각 1시간 30분씩 할 정도로 축구에 대한 열정이 큽니다. 저도 그에 못지않은 열정을 가지고 있던 터라 매번 함께 어울리면서 우정을 나눌 수 있었는데, 특히 운동을 통해 언어 소통의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해소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동시에 하느님께서 저에게 주신 달란트에 감사드리며 이를 잘 활용하겠다는 다짐 또한 하게 되었습니다.

공동체 마당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경

필리핀에 다녀온 후 주변 사람들로부터 ‘요즘 얼굴이 많이 밝아졌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고 있습니다. 저 스스로도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여러모로 자신감도 많이 얻었고, 기쁘게 잘 살고 싶다는 다짐이 많이 올라오는 요즘입니다. 매사에 너무 잘하려는 마음이 앞섰던 저의 지난 학기 모습들을 떠올려봅니다. 처음 공부하는 철학이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일임에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모습, 모든 내용을 단번에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데도 그러지 못하는 제 자신에게 실망하고 좌절했던 모습. 하지만 이제는 그것들을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에게 주신 능력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것,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것, 그것이 하느님께서 저에게 바라시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필리핀에서의 체험을 통해 저에게 이러한 교훈들을 알려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부족한 저를 위해 기도해주신 모든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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