낸시와 ‘보편적 사도적 선택’

‘낸시’, 칠 년 만에 돌아온 필리핀에서 가장 먼저 생각난 이름.

낸시(가명)는 제가 처음 이곳에 한 달간 영어를 배우러 왔을 때 만난 친구입니다. 당시 저와 동료 수사들은 영어를 배우는 것 외에 3, 4일 정도 마닐라의 가난한 곳을 방문하여 한 사람씩 지역 가정에 머무는 체험을 했는데 그때 제가 방문했던 집이 바로 낸시네 집이었습니다. 낸시네 집은 저희 수사들이 방문했던 가정 중에서도 특히 가난한 집이었습니다. 집이 바닷가에 지어진 건물 지하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밀물 때면 물이 들어차서 집안에서도 장화를 신고 있어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 찝찝함과 습함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자기 방이랄 것이 없이 모두 한 방에서 다 같이 생활하는 낸시네였지만 이 집에도 침대가 있는 방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가족의 첫째 딸인 낸시의 방이었습니다. (제가 방문했을 때는 그 방마저 저에게 제공되었습니다) 공부를 곧잘 했던 낸시는 당시 마닐라의 한 공과대학에 다니고 있었는데, 대학에 다니는 것 자체가 그 지역에서는 흔한 일이 아니었기에 부모님은 딸이 졸업 후 가족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주길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오는 낸시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는데, 열악한 환경과 가족의 기대라는 부담을 참 잘 견뎌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저는 그런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곧 이 친구가 졸업을 하고 직장에서 많은 돈을 벌어서 가족 전체가 좀 더 좋은 지역의 좋은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는 그런 상상 말입니다.

칠 년이란 시간이 흐른 후, 저는 신학 공부를 마무리하기 위해 다시금 필리핀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서 곧바로 이냐시오 축일을 맞이하게 된 저는 축일 행사에 낸시네 가족을 초대해서 얼굴을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간 그들의 삶이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하기도 했고요. 감사하게도 아버지를 뺀 가족 모두가 먼 거리를 와주었고, 저희는 축일 미사를 함께 봉헌하며 오랜만에 옛 추억과 근황을 나누었습니다. 행사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식구들을 배웅하고 나서 들었던 느낌은 ‘모두 조금씩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특별히 변한 것은 없구나’라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변화했기를 기대했던 것들은 더욱 그랬지요.

낸시의 가족들은 여전히 같은 집에 살고 있습니다. 초등학생이던 두 동생들이 이제 사춘기에 접어든 터라 가뜩이나 작은 집이 더 비좁게 느껴질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낸시는 대학을 졸업하고 몇 년 동안 직장을 다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전공으로는 경제적인 도움이 얼마 안 되었는지 현재는 직장을 그만두고 다른 전공으로 다시 대학을 다니면서 저녁과 주말에는 학비를 위해 일을 하고 있습니다. 낸시가, 또 제가 가지고 있던 희망은 다시 그만큼의 시간 동안 유예가 된 것입니다. 그리 대단한 희망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과거형으로 저의 기억에 남아있는 그들의 삶은 매일 밀물에 잠길 때마다 물을 퍼내야만 했던 그 때의 일과처럼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어떤 변화를 기대했던 제가 허무맹랑했던 것인지 기도 안에서 예수님께 여쭈어보게 됨과 동시에 여러 생각들이 떠올랐습니다. ‘예수님이라면 이 정도의 희망과 바람은 들어줄 수 있지 않으셨을까?’ ‘혹시 좀 더 진지하게 기도를 바쳤어야 했던 것일까?’ ‘이런 나는 낸시를 돕기 위해 실제로 무엇을 했나?’

얼마 전, 예수회는 앞으로 10년간 수도회가 지향점으로 삼아야 할 ‘보편적 사도적 선택(Universal Apostolic Preferences, UAP)’을 발표하였습니다. 예수회의 양성과정 중에 있는 저에게 이 선택들은 아직 그렇게 가까이 와닿지는 않지만, 그나마 제 마음에 머물고 여운을 남기는 것이 있다면 각각의 선택을 마무리하는(영어 원문으로는 시작하는) 몇 개의 단어들입니다. “~와 걷기(walking with)”, “~와 함께하기(journeying with~)”와 같은 단어들 말이지요. 이 표현들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보편적 사도적 선택’은 특정한 처지의 누군가에게 우선적인 수혜를 베풀어 문제를 해결해준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그들이, 또 우리가 함께 희망하는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그 길을 같이 순례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나약한 우리의 고백인지요.

생각해보면 우리는 누군가의 문제를 해결해줄 만한 능력이 많지 않은 미소한 이들입니다. 다만 그들의 희망 곁에 하느님께 의지하는 우리의 희망을 함께 둘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낸시는 저에게 있어서 추상적 개념인 ‘보편적 사도직 선택’을 살아 있게끔 해주는 친구입니다. 낸시는 미래를 고민하는 청년이며,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소외된 계층이기도 하고, 또한 기후 변화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받는 지역에 살고 있습니다. 제가 어떻게 그 친구가 지닌 희망의 ‘여정에 함께 하고’, ‘함께 걸을 수 있을지’, 생각하고, 고민해보고, 예수님께 여쭙게 됩니다. 함께 걷는 이 여정이 그저 우리가 어떤 변화를 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냉소로 귀결되지 않고, 예수님께서 함께 이 길을 걷고 계시다는 희망의 불씨를 가져갈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보편적 사도적 선택(UAP)’에 관한 글 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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