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에서 프로이트 읽기

캄보디아에서 일하는 동안 며칠간 휴가를 갖게 되었습니다. 딱히 계획이 있던 것도 아니어서 책을 한 권을 빌리게 되었는데 하필 프로이트의 논문 선집이었습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이후 몇 권의 선집과 관련 논문들을 추가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처음부터 프로이트에게 관심이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에 자크 라캉의 정신 분석학 세미나 책을 접했을 때 용어가 너무 어려워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는데, 라캉이 주로 프로이트를 인용하고 있었던 것이 과감히 프로이트 저작에 도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흔히 프로이트를 두고, ‘단순히 고전문학을 차용한 문학가’, ‘과학자인 척 했던 사기꾼’, ‘인간을 섹스로만 이해한 변태’라는 식의 비판이 많은데, 가톨릭교회도 그리 우호적이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부정적인 평가들에도 불구하고 제게 다가온 프로이트는 꽤 멋진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정신분석학에 문외한인 저로서는 그의 학문적 측면에 매료되었다기보다 프로이트라는 인물이 이야기하는 인간과 세상, 그리고 학문에 임하는 자세에 큰 매력을 느꼈습니다. 이에 관하여 간단히 세 가지 정도로 이유를 들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프로이트는 자신의 논문 곳곳에서 특유의 유머와 위트를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그는 정신분석가와 내담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전이(transfer)개념을 설명하면서 ‘자기처럼 이미 늙고 볼품 없는 사람은 전이에 빠질 일이 없을 것’이라는 뉘앙스로 설명합니다. 학문적인 글을 쓰는 와중에 이렇게나 스스럼없이, 솔직하다 못해 언뜻 보면 자존감이 떨어진 사람으로까지 보일 법한 자기고백을 하는 프로이트가 유머러스하다 못해 귀여워 보였습니다.

다음으로는 그가 인간의 정신(특히 무의식)에 관심을 가지고 이성적이고 과학적으로 설명하려 시도한 첫 번째 인물이라는 점입니다. 세계대전 이전의 유럽에서 근대적 사상을 접한 프로이트는 자신의 본래 전공인 전문의학분야를 중단하고 죽을 때까지 인간의 정신, 더 정확히는 무의식을 연구하는데 전념하였습니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근대시기의 인물이었습니다. 철학사에 관심을 가진 분들이라면 과거 근대시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상가들이 인간의 정신을 정의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했는지 잘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프로이트가 매력적인 이유는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인간정신에 대해 정의를 내리거나 단순히 그것을 기타 다른 논의를 위한 전제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인간정신, 즉 무의식과 무의식으로 비롯되는 여타 신경증과 현상을 과학적으로 검증하고 설명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그는 무의식을 연구하기 위해 기존의 최면요법을 거부하고 유머, 자주 반복하는 실수, 꿈 바로 이 세 가지에 주목했습니다. 이들은 인간의 정신을 연구하기 위한 기존의 단서들과 비교할 때 너무도 달랐습니다. 이렇게 프로이트는 대상을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볼 줄 알았던 창의적인 과학자였습니다.

마지막으로 학자로서의 자세를 들고 싶습니다. 프로이트는 경험적으로 관찰된 사실들을 일관된 가설로 설명하려 시도하고, 만일 그 가설이 사실에 부합하지 않을 경우 수정하여 새로운 이론으로 다듬어나갔습니다. 프로이트를 연구할 때 보통 전기 프로이트와 후기 프로이트로 나누어 구분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말년에 이르러 자신의 기존 입장을 바꾸어 (예를 들어 반복 강박(Wiederholungszwang)에 관한 주장 등) 새로이 자신의 학설을 수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프로이트 당대 많은 사람들이 그가 주장을 바꾸었다는 이유로 그를 비판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역으로 저는 이것이 단순한 말 바꾸기가 아니라, 학자로서 겸손하게 자신의 연구에 충실했던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자신의 기존 주장을 뒤집는 다른 임상결과가 나왔다면 그것을 인정하고 기존의 가설을 수정하여 새로운 주장을 제시하는 것이 학자의 본분이며, 이는 비난 받기 보다는 오히려 박수 칠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시행착오를 통해 끊임없이 객관적 사실,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바람직한 학자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캄보디아에서 프로이트를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는가? 저는 의사소통의 장애, 문화의 장벽, 그리고 서로 다른 종교라는 캄보디아의 상황 속에서 예수회 청년프로그램(Magis)과 성소계발 담당자로 일하는 동안 ‘우리가 서로 같은 인간이라는 점’,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정신이 우리 각자 안에 존재한다는 점’에 대하여 모두가 동의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에게 정신의 깊은 내면을 알고자 하는 갈망이 있다는 사실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영, 혼, 육이라는 그리스도교 인간학을 설명하면서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프로이트처럼 우리의 방법론을 검증하고 또 필요하다면 창조적인 상상력을 동원해 인간정신에 대한 탐구를 시도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관해 자주 말씀하셨지만, 세례를 받은 인간이 그 성령과 어떻게 작용하고 일하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의 선배들, 특히 사도 바오로는 우리 내면의 성령에 대한 관심이 엄청나게 많았던 것 같습니다. 바오로는 특히 갈라티아서에서 육과 성령을 대조하는데, 그 문장들을 보면 말 그대로 ‘장난이 아닙니다’. 갈라티아서만 보자면 바오로가 바라보는 인간의 기본 토대는 바로 인간이 창조된 목적이자 하느님만이 선사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자유롭게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다만 그 자유를 육을 위하는 구실로 삼지 마십시오. 오히려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갈라티아서 5장 13절

이어서 바오로는 육의 행실과 성령의 열매를 대해 논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

갈라티아서 5장 22-23절

바오로는 이를 어떻게 추론했을까? 그는 어떻게 자신이 바라보고 경험한 다양한 현상들 중에서 어떤 것은 육에서 비롯된 것이고, 어떤 것은 성령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구별할 수 있었을까?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가 취한 방법론과 추론 과정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오로를 두고 (프로이트가 받았던 비난과 동일한 방식으로) 그의 연구방법론은 잘못된 것이며, 서간들은 무의식처럼 검증할 수 없는 성령에 대해 논하므로 고전문학에 불과하고, 그 자신조차도 인간을 성령으로만 해석하려고 했던 광신도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때문에 수많은 사막의 교부들과 성인들, 현대 영성가들이 노력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인간정신, 더 나아가 성령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야 할 책무가 주어집니다. 적어도 이 성령이 우리 자신 안에 머물고 우리와 함께 일하는 한 그것을 탐구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며 함께 살아가는 것은 절대적으로 우리 각자의 몫이며,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성공적인 경험과 노하우를 전달해줌으로써 우리가 스스로를 탐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조언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프로이트가 그랬던 것처럼 이 영적인 탐구를 해나가기 위한 풍부한 상상력과 때때로 관심의 주된 대상으로부터 물러서서 자기자신과 세상을 관조할 수 있는 유머를 필요로 합니다. 무엇보다 이 길에서 필연적으로 겪게 될 시행착오를 두려워하지 않을 용기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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