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자 일기] 나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교우의 죄를 사하나이다

지난해 여름 서울에서 두 분의 동기 수사님들과 함께 사제품을 받고 로마에 와서 연학을 시작하였습니다. 예수회 안에서 저희들은 평수사로서 주님을 섬길 수도 있고 사제로서 섬길 수도 있습니다. 각자의 성소에 따라 식별하고 응답합니다. 그런가 하면, 똑같이 사제품을 청하면서도 내적인 갈망은 제각기 다를 수 있습니다. ‘왜 신부가 되려고 하는가?’ 에 대한 각자의 대답이 다 다른 것입니다. 저의 수도성소, 그리고 사제품에 대한 원의에는 여러 가지 배경이나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성사聖事’의 대리자로서 사제가 하는 역할이 제게는 매우 큰 의미를 지닙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저는 서품식 이후에 약 한 달 정도 우리 땅 이곳 저곳에 감사 미사를 드리러 다닌 후, 다시 학생 신분으로 돌아왔습니다. 공동체 미사에서 공동 집전을 하거나 미사 주례를 하는 경우 외에는 별다른 성사적 역할을 할 기회가 없는 것입니다. 생활양식으로만 따지고 보면 서품식 이전에 연학수사로서 공부하던 때와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주어진 공부가 새로운 사명이고 전심을 다해도 모자라기 때문에 별다른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제로서의 사목적 체험이 중요하다는 것을 직간접적으로 알고 있기에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제가 평소 열심히 공부하고 규율 잡힌 삶을 잘 살아가는 분이라고 생각해온 학우가 있었는데 그 즈음에는 왠지 축 처져있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는지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물어보기도 난처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그 학우가 제게 시간이 있으면‘ 도와 달라’고 했습니다. 무슨 도움이 필요한지 알고 봤더니 제게 ‘고해성사’를 볼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사제는 누군가가 고해성사를 청하면 열 일 제쳐 놓고 해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고해성사는 하느님 사랑을 그 어느 것보다도 더 내밀하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깨닫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저를 통해 하느님께 자신의 죄를 겸손하게 고백하고 용서받은 그 학우는 이후에 다시 편안한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학우를 통해서 오래간만에 그리스도를 대리하여 성사를 드리는 사제로서의 본분과 제 사제성소의 원의를 되새겼습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교회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두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한 몸을 이루는, 아울러 한 몸이면서도 다양한 지체를 지닌 것에 빗대어 설명하였듯이 각자는 소명도 다르고 역할과 능력도 다르기에, 모든 사람이 다 미사를 집전할 필요도 없고 고해성사를 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누군가는 그리스도를 대리하여 성사를 드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성사를 드리는 것은 특권이 아니라 은혜로운 섬김입니다. 그 섬김 안에서, 맨 처음 ‘하느님 말씀’에서 시작한 신앙이 세대에 세대를 거쳐 자자손손 전해지는 것이고, 성사의 체험 안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랑과 용서와 치유 그 자체이신 ‘하느님 말씀’을 새로이 깨닫고 용기를 내어 살아갈 수 있습니다. 특히 고해성사는 우리의 나약함과 죄보다도 하느님의 사랑이 훨씬 더 크시다는 것을 우리 삶의 매우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 알게 해주는 성사입니다. 그래서인지 제라드 브로콜로(Gerard Broccolo)라는 분은 고해성사를 ‘조용한 다이너마이트(quiet dynamite)’라고 하셨습니다. 고해성사가 믿는 이들의 삶에 미칠 수 있는 폭발적인 영향력을 두고 하시는 비유입니다. 우리를 옭아매는 죄를 직시하고, 그에 동조한 우리의 잘못을 책임감 있게 반성하고 성찰하면서, 동시에 우리 개인의 힘만으로는 죄의 힘을 쳐 이겨낼 수 없다는 것도 겸손하게 깨닫는 것이 고해성사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통회의 마음이 하느님과 만날 때 고해성사는 완성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 세상의 죄를 모두 합한 것보다도 더욱 크십니다.

‘죄인’ 이라는 표현에 거부감을 느끼실 분이 있으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열등감’, ‘콤플렉스’나 ‘나르시시즘’ 같은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모든 죄를 ‘심리적인 문제’로만 볼 수는 없지만 그런 문제는 우리를 죄로 이끌기 쉽습니다. ‘나’의 열등감 때문에 ‘너’를 미워합니다. ‘나’ 의 콤플렉스 때문에 ‘너’를 존엄성을 지닌 인간으로 보지 못하고 도구로 이용하고 맙니다. 그리고 ‘나’ 중심으로만 생각할 때에 공동체와 사회를 이루며 함께 살아가는 다른 이들의 처지를 헤아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사회의 정의와 평화에 대한 나의 사명을 망각하고 맙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죄스러운 상황’ 자체가 세상의 참 모습, 혹은 마침표가 아니라는 것, 주님께서 수난과 부활을 통해 그 모든 죄와 죽음을 이기셨다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고해성사는 강요와 단죄의 자리가 아니라 용서와 사랑을 재확인하는 은사입니다.

“나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교우의 죄를 사하나이다.”

죄 많은 저를 이 자리에 불러 주시고 이렇게 사죄경을 읊어서 하느님의 백성을 섬길 수 있게 해주시는 하느님께 송구스러운 마음과 감사를 함께 드립니다.

(이 글은 예수회 후원회 소식지 <이냐시오의 벗들> 2017년 6월호에 실렸던 ‘수도자 일기’를 일부 발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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