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자 일기] 정릉 가는 길

생활의 소소한 문제들에 파묻혀 있던 중 하루 여유가 생겼다. 2주 동안 머리를 짓눌렀던 과제도 끝났고, 마트에 가서 공동체 장도 봤고, 화장실 청소도 마쳤다. 스스로에게 뿌듯했다. ‘그래, 난 오늘 쉴 자격이 있어.’ 우선 휴대폰을 꺼냈다. 여러 번 화면을 위아래로 밀면서 평일 대낮에 나를 만나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늘은 혼자 보내라고 하시는구나.’ 빈약한 인맥의 아쉬움을 그분 탓으로 돌렸다. ‘어디로 갈까? 오래간만에 대형서점에 갈까? 아니, 다음 주 과제가 있으니 카페에서 책을 읽자. 근데 산책도 좀 하고 싶은 걸. 좋다, 정릉에 가자.’

4년 전, 길음동 성가복지병원에서 실습을 했을 때 정릉까지 걸어간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수련자였고, 입장료 천 원이 없어서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입구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이제 나는 정릉에 들어갈 수 있다. 게다가 고즈넉한 정릉 주변에는 분명 작고 조용한 카페가 있을 것이다. 찻잔을 옆에 두고 다리를 꼬고 책을 읽는 나의 모습이 그려졌다. 계획은 완벽했다.

정릉으로 가는 교통편을 검색하고 곧바로 출발했다. 신호등을 건너자 606번 버스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물 흐르듯 막힘 없이 성산대교와 연대를 지나쳤다. 이어폰에서 감미로운 음악이 나오고, 설레는 마음도 점점 커져갔다. 갑자기 버스가 좌회전을 했다. ‘어라, 왜 이 길로 가지? 내 기억에 정릉은 반대쪽인데.’ 다시 봐도 노선표 종점은 정릉이 맞다. 교통이 불편한 윗동네 사람들을 위해 버스가 조금 돌아가나 싶었다. 곧 있으니 기사님이 내리란다. 북한산정릉 입구. 지도를 보니 정릉동이란 곳이 엄청 넓어서 여기저기 전부 정릉이란다. 되돌아갈까 잠시 고민했지만 북한산 둘레길을 걸어 정릉으로 넘어가기로 결정했다. ‘아직 3시도 안 됐는데 좀 걷자. 정릉 구경하고, 카페 갈 시간은 충분하니까.’

걷기 시작했다. 거친 숨을 내쉬었지만 낙엽을 밟으며 걷는 산길이 좋았다. 산등성이에서 바라본 탁 트인 광경이 마음을 깨끗하게 해준다. 땅만 보고 살다가 하늘을 보니 기분이 상쾌했다. 이래서 사람은 하늘도 보고 살아야 하는구나. 버스 잘못 탄 민망함은 금세 사라졌고, 마음은 다시 들뜨기 시작했다.

한참을 걷다 보니 길 찾는 게 문제였다. 북악산 갈림길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어르신 한 분이 따라오란다. 함께 걸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은퇴 후 10년 동안 매일 등산을 하시는데 북한산과 북악산으로 둘러싸인 정릉이 얼마나 살기 좋은 동네인지, 그에 비해 집값은 너무 저평가되어 있다며 나와는 거리가 먼 부동산관련 이야기도 해주셨다. 동네에 진입하면서 ‘정릉마을을 사랑하는 모임’포스터를 보았다. 원주민들이 모여 개발보다는 마을을 가꾸고 돌보며 재생하고자 하는 모임이었다. 그러고 보니 집들이 참 예쁘다. 20년은 훌쩍 넘었을 오래된 집들. 긴 시간 한 가족을 보호하고 지켜주었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게다가 도로 중앙선 위에 제법 커다란 버드나무가 있었다. 통행을 방해하는데도 베어내지 않고 차들이 비켜가도록 도로를 놓았다. 사람과 길이 나무를 위해 불편을 감수하고, 서로를 배려하고 틀을 바꾼 모습들이 참 반갑고 정겨웠다. 오래된 동네 정릉에서 따뜻한 정이 느껴졌다.

어르신의 이야기를 듣고, 동네구경을 재미있게 하다 보니 정릉에 도착했다. 어르신께서는 정릉 안내도를 내 손에 쥐어주시고는 당신 집으로 가셨다. 생각보다 어렵게 갔는데 해가 진 적막한 정릉은 별 감동을 주지 못했다. 게다가 두 집 건너 하나 있다는 카페도 이곳에는 없어서 나는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완벽할 것 같았던 나의 계획은 조금은 이상한 결말을 맺었다. 이렇게 나의 소중한 하루를 보냈다. 되돌아보니 ‘정릉’보다 가는 길이 훨씬 좋았다. 북한산 둘레길이 좋았고, 가는 길에서 만난 어르신이 좋았다. 가는 길 옆 오래된 집과 동네가 좋았고, 가는 길 위에 버드나무가 좋았다.

“그렇군요, 주님. 목적지가 아니라 ‘가는 길’에서 당신을 만나는 것이었군요. 참 좋은 하루입니다.

(이 글은 예수회 후원회 소식지 <이냐시오의 벗들> 2018년 4월호에 실렸던 ‘수도자 일기’를 일부 발췌한 것입니다.)

One Reply to “[수도자 일기] 정릉 가는 길”

  1. 가는 길에서 만나는 하느님이라니.. 너무 좋으네요
    늘 모든 것 안에서 만나 뵐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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