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 있지만 살아있는 나무

나의 머릿속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몇 안 되는 기억들 가운데 어느 날 온 가족이 영화관에 가서 함께 영화를 보았던 기억이 하나 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희생>이란 작품이었는데, 당시 겨우 중학생이었던 나에게 전개가 매우 느리고 여러 상징이 숨어있는 작품을 가만히 앉아서 감상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었다. 영화관에 들어간 지 5분도 안 되어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마지막 5분을 남겨두고서야 겨우 잠에서 깼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영화의 처음과 끝 각 5분 동안 보았던 두 장면만큼은 지금까지도 아주 강렬하게 남아있다.

첫 장면은 성공가도를 달린 후 은퇴한 노년의 남성이 자신의 생일에 아들과 함께 강가에 썩은 나무를 심는 장면이다. 그의 이름은 알렉산더로, 그는 자기 아들 고센에게 한 수도승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수도승은 자신의 스승으로부터 매일 같은 시간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썩은 나무에 물을 주라는 명을 받게 되었다. 그는 매일 빠짐없이 임무를 수행했고 마침내 썩어버린 나무에 꽃들이 만개한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이후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알렉산더는 어찌 된 일인지 사람들에게 이끌려 무대 뒤로 퇴장하고, 홀로 남은 아들은 아버지가 이야기해준 수도승처럼 썩은 나무에 물을 주고 나무기둥을 베고 누워 하늘을 바라본다. 이때 카메라는 흔들리는 물결에 반사된 햇빛을 배경 삼아 나무를 아래에서부터 위까지 천천히 훑고 올라간다. 나무 전체는 빛에 감싸여 있다.

그렇게 영화가 끝나고 난 ‘그래서 나무는 살아있는가 죽어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그때 나는 나무가 살아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7년이 지난 지금 영화 속 같은 장면과 같은 질문은 나를 좀 더 깊은 곳으로 데리고 간다.

하느님을 믿기로 굳게 다짐을 하고 수도 생활을 하기로 마음을 먹은 후 나름 오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지금도 ‘왜 나의 삶은 뿌리내리지 못한 나무와 같이 죽어 있는 듯한가?’, ‘왜 하느님 말씀은 나를 아주 강렬한 힘으로 복음에 뿌리내리게 하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내 곁을 떠나지 않는다.

영화 <희생>은 이런 나에게 아주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무엇을 가지고 나무가 살아있다고 판단하고 느끼는가? 땅에 견고하게 붙어있는 것인가? 아니면 꽃을 피우는 것인가? 그도 아니라면 크기가 변화하는 것인가? 우리는 주로 세상에서 배운 상식을 동원해 나무가 살아있는지 죽어 있는지 판단하게 된다. 하지만 영화에서 나무는 처음이나 끝이나 뿌리가 덜렁거리고, 가지는 말라버렸고, 아무런 변화가 없는 작대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나무의 배경인 흐르는 강물에 반사되어 일렁이는 빛은 죽어 있는 나무가 마치 살아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기도 하고, 태초에 하느님의 영이 물 위에 감돌고 있었듯이 당장이라도 나무에 숨결을 불어넣어 생명을 줄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또한, 배경음악인 바흐의 마태 수난곡 중 39번째 곡 알토 아리아 <나의 하느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는 예수님을 세 번 모른다고 하였던 베드로의 노래인데, 이 부분에선 하느님을 저버린 인간이 다시금 생명이신 하느님의 자비를 간청하는 간절함이 느껴진다.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십수 년 전의 어린 나에게 나무가 참으로 살아있다고 느끼게 했던 것 같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기준으로 살아있다고 말하며 스스로 위안하고, 또는 죽어 있다고 절망하면서 자신을 괴롭히는가? 무엇이 우리를 살아있다고 믿게 하는가? 사람들의 관심과 인정? 누군가를 통제할 힘? 원하는 만큼 쾌락을 추구할 수 있는 기반? 하느님은 세상을 인류를 아름답게 보셨고 여전히 충실하게 사랑하고 계신다. 아마도 우리가 바라보는 시선과 하느님이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서일까? 단 한 순간이라도 그분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갈 수 있는 순간을 허락하시기를 간청하며!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요한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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