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 나의 예수님 그대

제가 생활하는 예수회 신학원에서는 한 달에 한 번 공동체 문화행사라는 것을 합니다. 보통 이날은 공동체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여 영화나 산책, 혹은 스포츠 등을 함께 즐깁니다. 한번은 <인생 후르츠> 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함께 보게 될 기회가 있었습니다. 어느 일본 노부부의 삶을 담은 영화인데, 90세의 건축가 슈이치 할아버지와 87세의 히데코 할머니의 슬로우 라이프를 그린 작품입니다.

젊은 시절의 슈이치 할아버지는 건축가로서 자연의 지형을 최대한 살리고 자연과 호흡하며 살아가는 도시를 제안하였습니다. 그러나 경제성과 사업성이라는 이름 하에 그 꿈은 받아들여 지지 않았고, 결국에는 우리도 잘 아는 아파트가 줄줄이 들어선 신도시의 모습으로 도시개발이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자신의 꿈이 좌절된 바로 그 도시에 300평 전원주택을 마련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동반자인 히데코 할머니와 함께 자신이 꿈꾸었던 자연과 함께 어우러진 슬로우 라이프를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런 노부부의 삶은 사실 할아버지의 오랜 꿈이었고 분명 할아버지가 살고 싶어 하는 인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영화 속에서는 할아버지보다 할머니가 더욱 열심히 일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조금 씁쓸한 마음이 들었지만, 히데코 할머니가 밝게 웃으며 묵묵히 기쁘게 일하는 모습이 비춰질 때마다 할아버지가 복을 받았다고 농담을 하며 가볍게 시청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영화를 보던 중 영화의 후반부에 들어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고, 남편의 장례를 치른 후 생기를 잃은 채로 삶을 살아가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앞서 보았던 두 분의 삶이 정말 아름다운 순간들이었다는 고백이 마음속에서 쏟아져 나오며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무엇이 저의 심장을 움켜쥐었는지 홀로 곰곰이 생각해보니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관계 안에서 만났던 예수님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삶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다른 사람과 함께 하기를 갈망합니다. 이때 관계 안에서 특별히 불편함이 없다면 한없이 좋습니다. 이렇게 관계가 이어질 수만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순간이 대부분입니다. 우리 각자는 서로 다르기에 선의로 건넨 말들이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때로는 나의 아주 자연스러운 말과 행동이 상대방에게는 커다란 불편으로 다가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무르익어가는 관계 속에서조차 나 아닌 다른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것은 여전히 하루에도 몇 번씩 자기 생각이 좌절되는 체험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체험을 하게 될 때마다 흔히 떠올리게 되듯 예수님께 의지하면 관계에서 오는 불편함이 모두 해결될 것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현실은 아무리 많은 위로를 받더라도 일상에서 느껴지는 관계의 어려움이 쉽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특히 어려운 관계의 경우,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나의 세계는 계속해서 침범되고 부서집니다. 그리고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바로 그 타인에게 맡기고 무한히 희망해야 하는 상황을 겪게 됩니다. 어쩌면 관계 안에 항구히 머문다는 것은 끊임없이 올라오는 불안과 함께하는 법을 배우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전 이런 어려운 관계 안에서 오히려 예수님의 신비를 체험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우리 인간에게 희망을 두시는지, 예수님께서 어떻게 울고 있는 마리아 앞에서 애간장 끓는 마음을 느끼셨는지,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어 오셨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등의 신비가 삶 속에서 더욱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자연스럽게 그분의 무조건적 사랑을 더 깊게 체험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서로 포기하지 않고 사랑에 머무른 노부부의 얼굴에서 하느님께서 인간과 맺으시는 관계를 봅니다. 하느님을 닮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누구에게나 주어진 한 가지는 바로 나의 곁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과 계속해서 관계에 머무는 길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머무를 때,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베푸셨는지 알게 됩니다. 그 큰 사랑 앞에 마음을 고쳐먹고, 관계 안에서 또 한 번 한 발짝 나아가리라 마음먹게 되는 것이 결국 하느님을 닮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게 예수님이 되어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섬기러 오셨듯 우리도 상대방을 섬길 수 있는 은총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부조리한 현실 앞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삶의 마지막에는 우리조차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우리의 모습을 사랑으로 품어 안는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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