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살아남

서울에서 태어나서 줄곧 도시에서만 살아왔던 내가 해발 200미터 높이의 태백산맥 자락에 자리 잡은 산골 마을에 들어와서 살기 시작한 지 3년 반이 지났다. 그동안 네 번의 겨울이 지났는데, 지난겨울은 그중에서도 가장 추웠다. 영하 25도까지 내려가는 온도계를 보면서 배롱나무들이 이 혹독한 추위를 견디어 낼 수 있을지 걱정이 많았다. 따뜻한 날씨에서 잘 자란다는 배롱나무는 매해 여름 내내 진분홍색과 흰색 꽃을 피우는 모양이 참 고왔는데, 재작년 추위에 한 그루가 그만 얼어버리고 말았다. 따뜻한 봄 날씨에도 더이상 새순이 올라오지 않는 나무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다가 어느 날 그루터기만 남기고 벨 수밖에 없었는데, 다행히도 뿌리가 살아남았는지 그루터기 가에 가느다란 가지가 자라서 올라오는 것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지난해 늦가을 무렵 그 가느다란 가지들이 겨울 동안 잘 지낼 수 있도록 농부 아저씨가 마치 붕대 감아주듯이 정성껏 지푸라기로 감싸 주셨는데, 올겨울은 재작년 겨울보다도 더욱더 혹독하게 추웠던 것이다. 난 배롱나무에게 짚 옷이 충분히 따뜻하기를 바라면서 지켜볼 뿐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몰랐다.

집 뒷동산 숲에는 십자가의 길이 있어서, 처음에는 운동할 겸 가벼운 마음으로 매일 30분 정도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이 십자가의 길은 내 마음속 어둠과 슬픔을 잔뜩 짊어지고 찾아가는 길이 되었다. 어느 날은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는 폭력의 기운이 감도는 말과 행동들을 지게에 짐 지고 가듯 지고 가서 “예수님이 사형선고 받으심”을 중얼거리며 그 앞에 털썩 내려놓는다. 이 무거운 짐들이 싫고 버거운데 어떻게 처리해야 할 줄을 모른다. 또 다른 날은 자신이 짓지 않은 잘못으로 인해 희생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삶의 슬픔을 마음에 가득 담아가지고 간다. 한번 마음에 들어온 슬픔은 좀처럼 마음 밖으로 나오려고 하지 않아서 난 그만 슬픔 안에 주저앉고 싶다. 그렇게 한참 머뭇거리다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애써 떼서 한 발자국씩 천천히 걸어본다.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허기진 들짐승 같은 폭력으로 인해 고통받는 예수님, 그 폭력에 맞대응하지 않고, 계속 넘어지면서도 오히려 자신을 위해 눈물 흘리는 이들을 위로하면서, 죽음을 향해 걸어가신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그렇게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신다. 무력하고 바보 같은 죽음이다.

그런데, 바로 그 십자가 아래에 서 있으면, 어느새, 정말 신비롭게도 내 마음에 위로의 빛이 스며든다. 난 이 빛을 어떤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지 잘 모른다. 다만 무겁고 짙었던 나의 어둠과 슬픔이 이제는 깊고 푸른 밤하늘처럼 맑은 빛깔로 변화했다는 것을 느낄 뿐이다.

어둠이 시커멓게 내려앉은 밤에 고개를 뒤로 젖히면 하늘은 별빛으로 반짝인다. 그림자 모양을 한 나무들 사이사이로 빛나는 별빛을 바라볼 때 깊은 어둠 속에 숨어있는 보석을 발견한 듯한 기쁨이 찾아온다. 그것은 마치 좋아하는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의 설레고 벅찬 마음이기도 한데, 내 마음 안에 채워지고 있는 이 경이로움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마음일 거라고 난 작은 목소리로 고백해본다. 하느님이 날 무척 좋아하시는구나…! 내가 배롱나무의 그루터기를 바라보며 걱정하듯이, 새순이 올라오는 것을 보며 뿌리는 살아있구나 감탄하며 기뻐하듯이, 아니 그보다 훨씬 더, 헤아릴 길 없이 깊고 높은 마음으로 하느님이 나를 돌보고 계시는구나…! 숲에서, 내 삶의 여정 안에서, 당신이 걸으신 십자가의 길 위에서 나의 어둠과 슬픔에 함께하시는 분, 온 창조 세계를 계속해서 새롭게 창조하고 계시는 하느님을 만나고 있음을. 나도 이 숲에서 그분을 점점 더 좋아하게 되었음을 작은 목소리로….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 (시편 8, 5)

(이 내용은 2021년 4월 25일자 서울대교구 청년주보에도 동시 기고되었습니다.)

권연담 소화 데레사

학부에서 음악학과 인류학을 공부하면서 인간의 삶에서 예술의 의미란 무엇일까 물으며 20대를 보냈다. 방황과 시행착오를 거치는 동안 서서히 질문이 바뀌어서, 이제는 어떻게 하면 삶을 예술로서 살아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현재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며, 수행과 학술 연구, 유기농 농사를 함께 하는 ‘도전돌밭공동체’에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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