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길을 뻗는다는 것

일주일에 한두 번, 제가 살고 있는 필리핀 아루페 인터내셔널 레지던스(Arrupe International Residence) 공동체 알림 게시판에는 ‘구호물자를 “repacking” 하러 가자’는 공지가 올라옵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현재 이곳 필리핀의 상황은 COVID-19로 인해 하루에만 1,000명에서 2,000명 사이의 확진자가 발생하고 있으며 설상가상으로 지난 11월 중순, 초대형 태풍인 율리시스(Ulysses)가 필리핀을 강타한 후 많은 이들이 침수 등의 수해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로 인한 가장 큰 피해는 이곳의 가난한 상황에 놓여있는 이들이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회 필리핀 관구는 선의의 기부자들과 협력하여 코로나든, 수해든 피해를 겪고 있는 분들에게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물품들을 대량으로 구매한 뒤 이를 다시 가족 단위로 고르게 나눠줄 수 있도록 재포장(repacking) 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습니다. 바로 이 작업에 함께 가자는 초대가 매주 목요일 공동체 게시판에 올라오는 것이지요.

일단 재포장 작업을 하는 실내체육관에 도착하면 모든 자원봉사자들은 마스크를 필히 착용하고 작업반장님들이 지정해 준 곳으로 가서 작업을 시작합니다. 작업은 말 그대로 재포장을 하는 것이기에 어렵지 않습니다. 쌀 포대 자루에 쌀, 라면, 위생용품(마스크, 손 소독제, 비누 등), 각종 통조림을 개수에 맞게 넣고 포대 자루를 단단히 묶어줍니다. 이렇게 완성된 하나의 구호물자 키트는 약 300 필리핀 페소(한화 약 7500원)라고 합니다. 재포장 작업을 완료한 키트를 가지런히 배열을 맞추어 모아두면 집채만 한 트럭이 와서 이를 싣고, 도움이 필요한 곳에 가서 나눠드리는 것이지요.

작업장에 모인 “우리”는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고, 또 필리핀 문화의 쾌활한 특성상 일하는 중에 노동요를 한껏 틀어놓고 하기에 서로 대화하거나 소통하기가 어렵습니다. 그저 두 손의 감각에만 의존한 채 각자가 마친 것을 다음 사람에게 건네줍니다. 어느 정도 각자가 맡은 포장에 숙달이 되면 옆의 봉사자에게 소위 노룩패스(No look pass)도 가능한 경지에 이르게 되지요. 어쩌면 이곳에서 우리는 우리 각자의 두 손을 공유하고 있고 서로의 손을 통해 대화하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지난 6월, 제4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2020년 11월 15일) 담화를 통해 “가난한 이에게 네 손길을 뻗어라”라는 집회서 7장 32절 성경 말씀에 주목하십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손길을 뻗는다는 것은 하나의 표징, 곧 친밀함, 연대, 사랑을 곧바로 연상시키게 하는 표징입니다. “가난한 이에게 네 손길을 뻗어라.” 따라서 이 말씀은, 자신이 공동의 숙명에 동참하고 있음을 느끼는 인간으로서 저마다 지닌 책임감으로 부르는 초대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약한 이들의 짐을 짊어지라는 권고입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교황님의 말씀 이전에 다른 이들을 위해 손을 뻗는다는 것이 어떠한 의미인지 몸소 삶으로 보여주신 예수님이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필리 2,6-8

성부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당신 손으로 꽉 움켜쥐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까지 순종으로 온전히 내어주셨던 예수 그리스도. 가난하고 죄인 취급당하고 아파하는 이들에게 항상 당신의 손을 뻗어 그들을 위로하셨던 예수님. 그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이 대림 시기에 그분께서 실제로 보여주신 삶을,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우리 안에 간직(필리 2,5)”할 수 있기를 희망해봅니다.

기껏해야 일주일에 한두 번, 한두 시간 정도 참여하는 재포장 작업이지만 제게는 많은 감정과 질문을 던져주는 시간입니다. 코로나 시대, 아홉 달째 필리핀에 살면서 숱하게 마주하는 무력감을 조금이나마 내려놓을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고, 각자의 손을 뻗어 절망에 놓인 이의 손을 따스히 부여잡는 것과 같은 느낌을 몸으로 체험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손을 통해 오늘도 성실히 일하시는 하느님께서 부디 당신의 크신 손으로 지금 이 시기, 가장 고통받고 절망스러운 상황에 있는 이들을 위로해 주시고 일으켜 세워 주시길 간절히 청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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