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7남매의 여섯째입니다

직장인이 된 지금은 별로 그럴 일이 없지만, 예전에는 자기소개를 할 일이 많았다. 초등학생 때는 반 친구들 앞에서 이름과 나이를 말하는 것 외에 ‘진짜 자기소개’를 해야 했는데, 친구들이 매년 새로운 취미와 특기 그리고 꿈에 관해 이야기할 때 생각은 너무 많고 말수는 너무 적었던 나는 머릿속이 하얗게 되곤 했다. 나에 대해서는 할 말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한 가지 뾰족한 수가 있긴 했다. 바로 가족을 소개하는 방법이었다. “저는 7남매의 여섯째입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고, 술렁이는 분위기를 틈타 나는 슬쩍 자리로 돌아와 앉을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그런 식으로 매년 반복되는 위기를 잘 넘긴 것 같다.

7남매와 부모님, 이렇게 아홉 명의 가족이 사는 우리 집은 나의 작은 우주다. 생김새와 성격, 취향과 가치관, 모든 게 다 다른 나의 형제들. 지금은 각자 흩어져 살고 있지만, 모두가 한집에 같이 살던 때에는 가족들을 관찰하는 것으로 내 하루가 시작하여 그들의 이야기만으로도 온 하루가 꽉 찼다. 춤추는 걸 좋아했던 동생은 러시아발레단이 나오는 비디오테이프를 매일매일 돌려보곤 했고, 막내 오빠는 공들여 기른 꽁지머리를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둘째 오빠는 피아노 방을 갖고 있을 만큼 피아노를 잘 쳤더랬다! 벽에다 방음용 계란판을 붙이는 일은 큰오빠가 손수 해줬는데, 나는 그때 큰오빠가 퍽 멋진 사람인 걸 알았다. 둘째 언니는 떡국에 김가루를 아주 많이 뿌리는 걸 좋아했고 언니가 쓰던 방 벽장 안엔 친구와의 교환 일기장이 그 김가루만큼(?) 많았다. 큰언니는 종종 예쁜 엽서며 인형을 내게 사다 주곤 했는데, 어느 날엔가 언니 마음에 쏙 드는 다이어리를 찾기 위해 내 손을 잡고 온 시내를 뒤졌던 적이 있었다. 그때 일이 너무 고생스러워 아직도 나는 다이어리를 쓰는 취미는 없지만, 그 일을 언니와의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형제들에 관해서라면 나는 이런 식으로 끝없이 얘기할 수 있다. 어쩌면 자기소개가 어려웠던 이유는 내 어린 날의 관심이 온통 형제들에게 가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직도 나는 그들이 궁금하여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피아노를 그만두던 날 요한의 마음은 어땠을까? 어느 크리스마스 이브날 이젤 앞에다 날 앉히고 초상화를 그려줬던 마네는 어쩌면 화가가 되고 싶었을까? 루비와 데레사는 내 나이 때 어떤 생각을 하며 서울의 밤거리를 다녔을 것이며,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후회가 없다면서 내 꿈을 지지해줬던 안드레아가 자신의 꿈을 접어야만 했던 건 언제였을까? 이냐시오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내가, 우리 모두가, 그 아이를 아주 많이 사랑한다는 걸 알고 있을까?

어떤 추억은 서로 다른 시간을 지나 각자의 마음속에 묻어둔 비밀 같아서 쉽게 물어볼 수가 없다. 그래서 가끔은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까마득한 거리를 사이에 둔 천체를 관찰하듯 내 형제들의 삶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하지만 내 우주를 가득 채운 그들이 동시에 나로부터 아주 먼 곳에 있다는 걸 새삼스레 깨달았다 해도, 우리의 시차를 아쉬워하는 그만큼의 공간엔 언제나 끝나지 않을‘사랑’이 뻗어 있다. 그들의 시간이 난 여전히 궁금하고, 그들의 존재가 벅차게 감사하며, 그들의 삶이 평안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서로 포갤 수 있는 삶의 면적이 점점 더 줄어들지라도 내 작은 우주는 언제까지나 그들로 가장 빛날 것이기에.

‘나만의 이야기’는 여전히 어떻게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오늘도 가족 얘기로 내 몫의 분량을 슬쩍 채운 걸 보면 말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내 작은 우주의 빛나는 일곱별들의 이야기가 어쩌면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언젠가는 그 이야길 들려줄 수 있는 날이 올까? “저는 7남매의 여섯째입니다”로 시작하는 바로 그 이야기를.

(이 내용은 2020년 12월 27일자 서울대교구 청년주보에도 동시 기고되었습니다.)

홍찬미 글로리아

2015년,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님의 인도로 메주고리예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한 후, 완전히 다른 삶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2019년부터 서강대학교 성 이냐시오 성당에서 일하며 청년들을 만나고 있고, 요즘은 쓰고 그리고 노래하는 일을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습니다. 자기소개에는 소질이 없지만, 차분히 서로 알아갈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저는 7남매의 여섯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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