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편한 삶

저는 일반대학 학부를 3학년까지 다니고 휴학을 한 상태로 예수회에 입회했습니다. 예수회원들은 학업을 끝마치고 보통은 직장생활도 어느 정도 경험해본 후 입회를 하므로 저는 조금 이른 나이에 입회를 한 편입니다. 그래서 수련기를 마치고 수도자로서 첫 서원을 발했을 때도 다른 동기 수사님들은 대학원에서 양성과정을 이어갔지만, 저는 같은 연학 공동체에 살면서도 전에 다니던 학교에 복학해야 했습니다.

몇 년 만에 돌아간 학교는 입회 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수도회의 삶의 양식에 따라 살아야 했던 저로서는 어려운 일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곤란한 일이 발생할 때마다 제 신분이 수도자임을 밝힐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수사’가 대체 뭐 하는 사람인지 아는 학생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본당 신자분들조차 수사에 대해 잘 모르셔서 “저는 ‘남자 수녀’ 같은 거예요.”라고 스스로 소개를 하는 마당에 다른 학생들이 제 입장을 대번에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언감생심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따라 강의를 들으며 안면을 조금 튼 친구 하나와 지하철역까지 이어지는 귀갓길을 함께 걷게 되었습니다. 걷다 보니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친구는 제게 자신의 미래와 관련한 고민을 살짝 털어놓았습니다. 제 편에서도 마치 답례처럼 비슷한 이야기를 하려니 자연스레 저의 신분을 밝히게 되었고, 신앙이 없던 그 친구에게 짧게나마 수도회 생활에 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내내 조용히 듣기만 하던 친구는 제 말이 끝나자 단조로운 어조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되게… 편하겠네요.”

저는 이 말을 듣고 매우 당황해서 뭐라고 답을 하지 못한 채 한동안 멍하니 있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는 말이 더 맞을 것 같습니다. 그 친구의 말인즉슨, 수도회라는 곳에서 생활도 공부도 책임져준다 하니 전 그저 주어진 길을 잘 걷기만 하면 되는 것이고, 따라서 미래에 관해서도 애써 고민할 것이 없겠다는 의미였습니다. 수사가 된 후로 주로 신자분들만 만나던 저로서는 꿈에도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이 제가 속한 세대의 현실적인 고민에서 나온 약간 거칠지만 솔직한 반응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그날 밤, 공동체 경당에 앉아 성찰을 하는데 문득 입회 전 읽었던 글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수도생활이 주는 안정감으로부터 위안을 느끼고 있지는 않은가?’ 단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은 문제였지만 완전한 부정을 하기도 어렵다고 느꼈습니다. 당장 매일같이 치열하게 살아가는 가까운 친구들을 보며 결코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그 삶의 무게와 고민 앞에서 매번 침묵과 기도로 함께 할 수밖에 없는 것은 곧 저의 약함이자 아픔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날의 일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제 안에 커다란 화두로 남았습니다.

세상에 매인 것이 적은 수도자들은 실제로 당장 먹을 양식을 고민하거나 딸린 식구의 안위를 걱정하는 일이 많지 않습니다. 그 친구의 표현대로 ‘편한 삶’입니다. 그러나 전 이것이 축성생활이 가진 강력한 무기라고 생각합니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하느님의 일에 더 크게 투신하기 위한 ‘참 편한 삶’인 것입니다. 만일 수도자가 수도생활의 안정성이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지 잊는다면, 이 편한 삶은 한낱 평범한 인간일 뿐인 수도자 개인의 안위 만을 위한 편한 삶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가끔 신자분들이 제게 이런 말씀을 해주십니다. “수사님, 세상 걱정이 없어서 그런지 얼굴이 맑아요.” 말의 저의는 차치하더라도 이는 그날 친구가 무심히 건넨 말처럼 수도자로서 제게 언제나 커다란 책임감을 불러일으키는 말입니다. 참고로 그 친구는 무사히 졸업을 하고 우리나라에서 해당 분야에 가장 뛰어나다는 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학생의 신분으로 수도여정을 시작하며 세속의 짐으로부터 일찍 자유로워진 것은 저에게 필요한 몫이었습니다. 이를 늘 감사하게 여기며, 제가 가지 않은 길 위에서 오늘 하루도 충실히 신앙을 살아내려 노력하는 또래 청년들의 열정에 존경과 기도를 드립니다.

(이 글은 11월 22일자 서울대교구 청년주보에도 동시 기고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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