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를 해야겠어요

나는 빨래하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특히 봄과 가을의 구름 한 점 없는 바다 빛 하늘과 내리쬐는 은은한 햇볕 그리고 살랑이는 바람이 있는 날이면 어느덧 나는 세탁기 앞을 서성이고 있다. 빨래를 갓 마친 탓에 아직은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은 옷들이 가지런히 빨랫줄에 매달려 흔들흔들 바람을 타는 모습은 나에게 세상 어떤 장면보다 더 큰 편안함을 준다. 그렇게 빨래가 마르는 것을 한동안 멀거니 바라보는 것은 내 삶의 기쁨 중 하나이다.

이런 내가 빨래에 대해 새롭게 바라보게 된 사건이 하나 있었다. 유난히 볕이 좋았던 어느 가을날 오후, 한 선배 신부님께서 빨랫감을 한 아름 안고 내가 살고 있던 공동체에 들어오시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신부님, 빨래하러 오셨나 봐요?”라고 물었다. 그분은 다른 공동체에 살고 계셨던 신부님이셨는데 내 질문에 약간은 쑥스러워하시면서도 나지막이 대답하셨다.

“민웅 수사님, 햇볕하고 바람하고 물 좀 빌립시다.”

빨래하러 왔다는 말 대신 햇볕과 바람과 물을 빌리러 왔다니, 마치 빨래라는 무림의 은둔 고수를 만난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그렇게 신부님께서 빨래를 하시는 동안 신부님과 나는 서로가 평소에 지니고 있었던 빨래에 대한 단상을 나눴다. 물론 신부님께서 햇볕과 바람과 물을 빌리고자 청했던 대상이 내가 아니었음은 이야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쉽게 밝혀졌다.

쉽사리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려는 시각과는 다르게 작은 것 안에서도 하느님의 시선을 느끼고 그 모든 주도권마저 주님께 내어드리고자 하는 모습에서였을까? 빨래라는 다분히 사소한 일상을 통해 신부님께서 내게 보여주신 당신의 마음자리가 무척이나 오랜 시간 동안 기억에 또렷이 남아있다. 때때로 세상 모든 것을 스스로 좌지우지할 수 있을 것처럼 삶을 대하고 있지는 않은지 요즘도 난 종종 신부님과 나눴던 대화로 나 스스로를 비추어보기도 한다.

서품 신학 공부를 위해 필리핀 마닐라에 온 지도 어느덧 다섯 달째가 되어간다. 공항을 빠져나오자마자 느꼈던 ‘훅!’하는 습기가 우기(雨期)에 접어들면서 더욱 드세지는 듯하다. 이곳에 도착해서 두어 달간은 그렇게도 좋아했던 빨래에서 기쁨을 찾지 못했다. 어쩌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상황, 새로운 질서 안에서 빨래를 해야 하는 나 스스로를 준비하는 시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다시, 빨래를 통해 내가 한결같이 받았던 평화로움에 머물고 싶다. 과거에 마치 당연한 것처럼 주어졌던 것이 현재 눈앞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안타깝고 속상한 마음보다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더 초점을 두면서. 하느님께서 지금까지 수많은 것을 나에게 허락해주셨고, 기꺼이 당신께서 나에게 내어주셨을 때의 마음 또한 헤아려보면서. 그리고 여태까지 그분의 내어주심이 결코 당연했던 것이 아님을 고백하면서 말이다.

이곳에서의 빨래가 이전에 해왔던 빨래보다 미덥지 못하고, 더 많은 기다림이 필요한 것은 틀림이 없다. 하지만 나는 이곳에서도 전과 같이 하느님의 주심과 당신께서 몸소 나를 돌보심을 신뢰하며 빨래를 할 것이다. 그리고 비록 이전보다 훨씬 더디겠지만 역시나 전처럼 빨래가 마르는 장면을 평화로이 바라볼 것이다.

저희는 당신께 희망을 둡니다.

당신께서 이 모든 것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예레 14,2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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