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수도자가 페이스북에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하여

연학수사로 살면서 쉽지 않은 순간들이 있다. 일상을 벗어나 어디론가 훌쩍 여행을 떠나고 싶을 때, 낯선 누군가와 불현듯 사랑에 빠져보고 싶을 때, 화려한 밤거리를 걷다가 분위기 좋은 곳에서 술 한잔하고 싶을 때 등. 나열하면 더 있겠지만 오늘 나누고 싶은 주제는 조금 다른 것이다. 바로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못할 때’의 어려움이다.

예수회 입회 전 가끔씩 ‘싸이어리'(이 용어를 쓰면 아재라 할지 모르겠지만, 약 10년 전 유행했던 ‘싸이월드 미니홈피’의 다이어리를 지칭한다)에 글을 쓰곤 했었다. 일기장이라고 하지만 사실 남이 들어올 수 있는 내 홈페이지에 독백 아닌 독백을 하고, 속내를 감추듯 드러내는 것이었다. 아무튼, 마음이 힘들 때 미니홈피에 글을 쓰고 나면 가슴 한쪽에 무언가 사르르 녹는 느낌이 있었다. 이를 위안이라고 불러도 좋을 테다. 있는 그대로의 내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데서 오는 위안, 가슴 한쪽에 있던 덩어리들을 단어라는 구체적인 모양들로 빚어낼 때의 위안.

하지만 수도자가 되고 나니 이게 좀 어려워졌다. 글을 써서 SNS에 올리기 전에 내 안에 여러 생각이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수도자라면 응당 기쁘고 좋은 것들을 올려야겠지, 성숙한 신앙인으로서 남들 보기에 흠잡을 때 없는 내용을 올리는 게 좋을거야, 내가 느끼는 혼란과 화, 후회, 공허함에 대해 표현해도 될까, 우리 수도회 신부님들이 내가 요즘 잘 못 지낸다고 걱정하시진 않을까…’ 이런 생각들이 은연중에 내 마음 한쪽에 자리 잡아 글쓰기의 발목을 잡았다.

그러나 수도자는 Siri가 아니고, 도덕책도 아니며, 냉혈한은 더더욱 아니다. 그저 한 ‘사람’이다. 예수님이 정말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던 것처럼. 내 안에는 평범한 사람이 느끼는 온갖 것들이 다 있다. 질투, 후회, 분노, 혼란, 좌절, 사랑받고 싶은 간절한 욕구와 같이 남들에게 감추고 싶은 것들을 포함해서 말이다. 내게 글을 쓴다는 것은 가슴 속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다가 가끔 마음을 쿡쿡 찌르는 이것들에게 작고 따스한 조명을 비추어주는 일이었다. 글쓰기를 통해 이들에게 빛을 비추다 보면, 웅크리고 있던 검은 그림자가 다름 아닌 내 안에서 울고 있는 어린아이임이 보였다. 아주 여리고 상처받기 쉬운 그런 어린아이 말이다. 나는 글쓰기라는 행위로 이 아이를 따뜻이 안아주곤 했다. 이 아이가 용기 내어 미소 지을 수 있도록.

나는 ‘수도자로서’ 여전히 이를 계속해 나갈 수 있을까. 이는 분명 내게 필요한 치유의 과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위험도 있다. 글쓰기를 통해 이 아이가 남들 앞에 드러난다는 것은 곧 상처받기 쉬운 속살이 드러나는 것이기도 하니까. 자칫하면 이 아이가 더 아파하고 더 웅크리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눈앞에 배를 드러내고 누운 강아지를 쓰다듬어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발로 차버리는 사람도 있으니. 그래서 나는 고작 페이스북에 글 하나 올리는 것을 두고 그리도 고민을 했는지 모르겠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르 9,36-37 참조) 글쓰기가 예수님의 손길이 될 수 있을까. 내 안에서, 또 나와 같이 평범한 사람들 안에서 울고 있는 어린아이를 껴안으시는 그분의 따뜻한 손길 말이다.

(이 글은 5월 24일자 서울대교구 청년주보에도 동시 기고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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