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학수사로 살면서 쉽지 않은 순간들이 있다. 일상을 벗어나 어디론가 훌쩍 여행을 떠나고 싶을 때, 낯선 누군가와 불현듯 사랑에 빠져보고 싶을 때, 화려한 밤거리를 걷다가 분위기 좋은 곳에서 술 한잔하고 싶을 때 등. 나열하면 더 있겠지만 오늘 나누고 싶은 주제는 조금 다른 것이다. 바로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못할 때’의 어려움이다.
예수회 입회 전 가끔씩 ‘싸이어리'(이 용어를 쓰면 아재라 할지 모르겠지만, 약 10년 전 유행했던 ‘싸이월드 미니홈피’의 다이어리를 지칭한다)에 글을 쓰곤 했었다. 일기장이라고 하지만 사실 남이 들어올 수 있는 내 홈페이지에 독백 아닌 독백을 하고, 속내를 감추듯 드러내는 것이었다. 아무튼, 마음이 힘들 때 미니홈피에 글을 쓰고 나면 가슴 한쪽에 무언가 사르르 녹는 느낌이 있었다. 이를 위안이라고 불러도 좋을 테다. 있는 그대로의 내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데서 오는 위안, 가슴 한쪽에 있던 덩어리들을 단어라는 구체적인 모양들로 빚어낼 때의 위안.
하지만 수도자가 되고 나니 이게 좀 어려워졌다. 글을 써서 SNS에 올리기 전에 내 안에 여러 생각이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수도자라면 응당 기쁘고 좋은 것들을 올려야겠지, 성숙한 신앙인으로서 남들 보기에 흠잡을 때 없는 내용을 올리는 게 좋을거야, 내가 느끼는 혼란과 화, 후회, 공허함에 대해 표현해도 될까, 우리 수도회 신부님들이 내가 요즘 잘 못 지낸다고 걱정하시진 않을까…’ 이런 생각들이 은연중에 내 마음 한쪽에 자리 잡아 글쓰기의 발목을 잡았다.
그러나 수도자는 Siri가 아니고, 도덕책도 아니며, 냉혈한은 더더욱 아니다. 그저 한 ‘사람’이다. 예수님이 정말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던 것처럼. 내 안에는 평범한 사람이 느끼는 온갖 것들이 다 있다. 질투, 후회, 분노, 혼란, 좌절, 사랑받고 싶은 간절한 욕구와 같이 남들에게 감추고 싶은 것들을 포함해서 말이다. 내게 글을 쓴다는 것은 가슴 속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다가 가끔 마음을 쿡쿡 찌르는 이것들에게 작고 따스한 조명을 비추어주는 일이었다. 글쓰기를 통해 이들에게 빛을 비추다 보면, 웅크리고 있던 검은 그림자가 다름 아닌 내 안에서 울고 있는 어린아이임이 보였다. 아주 여리고 상처받기 쉬운 그런 어린아이 말이다. 나는 글쓰기라는 행위로 이 아이를 따뜻이 안아주곤 했다. 이 아이가 용기 내어 미소 지을 수 있도록.
나는 ‘수도자로서’ 여전히 이를 계속해 나갈 수 있을까. 이는 분명 내게 필요한 치유의 과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위험도 있다. 글쓰기를 통해 이 아이가 남들 앞에 드러난다는 것은 곧 상처받기 쉬운 속살이 드러나는 것이기도 하니까. 자칫하면 이 아이가 더 아파하고 더 웅크리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눈앞에 배를 드러내고 누운 강아지를 쓰다듬어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발로 차버리는 사람도 있으니. 그래서 나는 고작 페이스북에 글 하나 올리는 것을 두고 그리도 고민을 했는지 모르겠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르 9,36-37 참조) 글쓰기가 예수님의 손길이 될 수 있을까. 내 안에서, 또 나와 같이 평범한 사람들 안에서 울고 있는 어린아이를 껴안으시는 그분의 따뜻한 손길 말이다.
(이 글은 5월 24일자 서울대교구 청년주보에도 동시 기고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