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혼주의자의 결혼성소 입문기

우리 할머니는 내가 어릴 적에 틈만 나면 수녀가 되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나한테 성소가 있다는 알 수 없는 말을 덧붙이시면서. 그때마다 내가 했던 대답을 기억한다. “싫은데요. 저는 결혼할래요.” 이후 인생을 살아가면서 대개는 그 말을 잊고 지냈지만 난 많은 순간 내 성소에 대한 궁금함을 안고 자랐다. 십 대 후반, 마음속으로 하느님을 참 미워하던 때조차 ‘당신이 계시다면 대체 나를 어디로 부르시는지’가 궁금해 항의로 가득한 기도를 하곤 했으니 말이다.

부르심에 대한 의문은 나를 저 멀리 캄보디아로 이끌었다. 내 나이 스물 여섯의 일이었다. 그 무렵의 나는 의미 있는 일을 찾아서 하며 살고 싶었고, 무엇보다 자유롭게 내 모습 그대로를 찾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캄보디아에 가기 전 한국에서 나는 언제나 조급했고 무엇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내 자신을 자주 혼내곤 했다. 남들이 보기에 번듯한 직장을 잡고, 때가 되면 결혼을 하고, 세상이 보기에 쓸모 있는 사람으로 성장해야 할 터인데 정작 내가 원하는 길은 그것이 아닌 것만 같으니 그 괴리감은 매일 밤 회초리가 되어 무섭게 나를 찾아왔다. 다행히도 캄보디아에서 보낸 2년의 시간은 그 모든 불안에 대한 답을 내리게끔 해주었다. 다만 그 답에는 언제나 한 가지 조건이 붙었다. ‘비혼’

나의 꿈들이 자유를 필요로 했기 때문일까? 비혼, 아니 가톨릭 신자로서 좋게 말해 ‘독신성소’를 결심하고 나니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이 이렇게나 많았구나’하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캄보디아에서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내 수많은 꿈을 아주 적극적으로 지지해주는 사람이었고 또한 나와 같은 비혼주의자이기도 했다. 우리는 그렇게 연애를 시작했다. 비혼주의라도 연애는 할 수 있으니까. 실제로 그와의 연애는 내 나름 상상했던 것에 많이 부합했다.

시간이 흘러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고 그는 나를 따라 세례를 받았다. 그가 비영리법인에서 일을 하기 시작할 무렵에는 나 또한 새로운 꿈을 꾸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서로의 지지와 격려가 있었기에 선택할 수 있던 것임을 우리는 알았다. 그와 나의 관계는 그렇게 안정적으로 무르익어가는 듯했다. 함께 한 지 3년이 지난 어느 날 갑자기 그가 내게 폭탄 발언을 하기 전까지는.

프러포즈는 지극히 평범한 어느 주말 집안 대청소를 하던 내가 그에게 전화를 걸어 곰팡이를 지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던 ‘문제적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자기 집에 있는 락스를 가져다주겠다고 했는데 나중에 듣기로는 락스를 들고 내게 오는 길 위에서 결혼을 결심했다고 한다. ‘결혼하자’라는 말과 함께 대뜸 눈물을 흘리며 락스를 건네는 그를 보는 순간 나 역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서로의 생활 속에 더 깊이 속하고 싶다는 특별한 부르심이 우리 둘의 마음속에 요동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우연처럼 시작된 혼인 준비는 실로 어려웠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결혼을 아주 거대한 벽처럼 여기던 독신주의자들이었고 그만큼 강한 자아의 소유자들이었다. 우리 두 사람에게 있어 이 결혼은 각자 한 사람의 몫을 하기에도 버거운 두 사람이 아주 큰 공동체를 이루기로 하는, 기적과도 같은 도전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세상에 읽히는 결혼의 의미는 우리가 읽는 결혼의 의미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이 사회는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 곳곳에서 신랑과 신부 각각에게 정해진 역할을 내내 들이밀었다. 무엇보다 나에게 이 결혼은 내 이름을 지우는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결코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 서로 손을 꼭 잡고 다짐을 해보아도 무서운 교정의 가르침이 사방에서 밀려 들어왔다. 아내라면, 며느리라면, 혼인한 여성이라면 ‘이래야 한다’는 정언명령들. 그 명령은 알지 못하는 적의 외침으로 들려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부모님과 친구들, 동료와 같이 내가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더 크게 전해졌다. “이제 결혼하면 이렇게 못 만나겠네.” “이제 네 시댁 가서 이런 거 해야지.” “지금이야 자유롭게 야근도 하지, 결혼하면 완전히 달라질 걸?” 지극히 평범한 말들이 내게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 ‘나를 무너뜨릴지도 모르는 이 위험천만한 혼인을 꼭 해야 하는 것일까?’ 바보 같은 질문들이 내 안에 쌓여가면서 우리 관계의 긴장도 커져만 갔다.

다소 진부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때 나에게 해답을 준 것은 다름아닌 기도였다. 많은 기도 중 내게 답이 되어준 성경 구절은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였다. 어리석게도 그때야 알았다. ‘아, 기쁜 일이구나!’ 무엇보다 그 ‘기쁜 일’은 내가 선택한 일이었다. 당혹스러웠다. 하느님의 시선에서 나의 그 긴 고민은 참으로 기쁜 일이었을 텐데, 나는 그 짧은 사이 그것을 잊고 나 자신을 잃을까 하는 두려움에 싸여 또다시 혼란스러워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느님의 시선을 빌려 바라보자 놀라운 사고의 전환이 일어났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기꺼이 헌신과 양보를 선택하는 일이 하느님의 시선에서는 얼마나 귀한 것일지를 생각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스스로의 자유와 인격을 지키기 위해 함께 대화해 나갈 것들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차이가 있다면 이제 그 고민은 더는 ‘내’가 아닌 ‘우리’의 숙제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와 나는 가장 우선적으로 우리 자신의 언어를 돌아보기로 했다. 집안일에 서툴거나 잘 먹지 않는 신랑을 보살피는 일이 신부의 일이라는 듯한 말을 하지 않고, 혹시라도 그런 말을 듣게 된다면 정중하게 거절하기로 했다. 각자 ‘우리 부모님은 안 그래.’라는 생각을 버리고,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굳이 말로 옮기지 않기로 했다. 나의 부모님은 나를 가장 사랑하기 때문에 그에게 그런 말을 할 것이고, 그의 부모님 또한 그를 가장 사랑하기 때문에 나에게 그와 비슷한 말을 할 것이다. 누구의 잘못이라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우리 둘은 그 말이 서로에게 어떤 감정을 자아낼지에 대해 섬세하게 느끼고자 노력하기로 약속했다. 이런저런 약속들이 늘어가면서 나는 이 길이 진정한 부르심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언제나 내가 내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도록 나를 일깨우신다는 것을, 함께 하는 길로 끊임없이 초대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속에서 그 누구도 구속받거나 고통받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혼인은 더 큰 공동체로의 초대이자, 두 사람과 그 둘을 중심으로 한 모든 사람이 새로운 지평으로 세상을 보고 나와 다른 이들에 대해서도 생각하게끔 하는 무거운 성소의 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꾸준히 대화해야 한다. 상대방과도, 나 자신과도, 그리고 하느님과도. 만약 내가 독신의 길 위에서 부르심에 대한 꾸준한 물음과 응답을 구하는 삶을 살았다면 나의 성소는 거기에 있었으리라. 하지만 나는 함께 물으며 가는 것을 선택했고 그 선택을 기뻐하기로 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알기에.

(이 글은 4월 26일자 서울대교구 청년주보에도 게재 되었습니다.)

정다운 안젤라

캄보디아에서 나름대로 갱생(?)의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후 이십 대 젊은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재밌는 일을 기획하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데 되도록이면 일대일로 만나는 걸 선호하는 편입니다. 이냐시오 영성을 통해 하느님을 만났으며, 약하고 소외된 이들의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을 닮고 싶습니다. 여성, 환경, 장애인, 동물, 젊은 사람, 영화, 소설, 사진에 관심이 많습니다. 현재는 마지스 예수회 청년센터 청년사목 코디네이터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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